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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위대한 도전인생을 살았던 산악인 박영석 대장을 추모하며...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175.207.133.105)
  • 작성일 2012-03-17 17: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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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573
  • 평점 0점

안녕하세요 김성문입니다 ^^

 

 

이 글은 지난 10월 18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네팔 8,091미터) 등반도중 불의의

 

사고로 실종된 故 박영석대장을 추모하면서 본인의 고교동문회 카페에 쓴 글 입니다.

 

 

“지칠 줄 모르는 정신력의 소유자”이며 “불꽃같은 도전인생”을 살다 간 박영석의

 

길지 않은 삶을 추모하고, 또 그가 살아남은 우리에게 던진 메시지를 되새기면서 감동과

 

희열을 선사해 준 박영석을 애도하면서, 이제는 “ 한때 그런 탐험가가 있었구나 ! ” 식의

 

일반 국민들의 뇌리에서 지워져만 가는 박영석의 위대한 도전인생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제 나름대로 작성한 글입니다.

 

 

박영석대장과 신동민 강기석대원의 가족과 주위 분들에게 진심으로 위로를 드리면서

 

아울러 사리사욕을 떠나 박영석에게 물심양면 사랑과 애정을 보내주셨던 신언훈 부국장님

 

(SBS 교양제작국), 이인정 회장님(대한산악연맹), 구자준 회장님(LIG 손해보험), 한필석

 

기자님(월간 산), 정상욱 상무님(North Face 영원무역) 그리고 제주도에 이종량 선배님께

 

애도를 표합니다.

 

 

저물어 가는 올해 즈음에 꼭 기억해야만 하는 제 인생의 일대(一大) 사건(?)으로 박영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썼습니다.

 

 

 

감사 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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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영 석 ( 1 )                                                            ( 2011년 10월 25일 작성 )

 

 

 

아마도 고등학교 때 인거 같다

 

이미 작고하신 산악인 고상돈씨가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 등정에 성공하고

 

시청주변 대로에서 카퍼레이드를 했다.

 

오픈찦차에 서서 태극기와 꽃다발을 들고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며, 빌딩에서는

 

오색 색종이가 눈가루처럼 흩날리는 장면이 기억난다.

 

얼마후 박영석은 내게 “ 산악인 고상돈씨가 너무 멋지지 않냐 ? ” 며 자기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동국대 체육학과에 진학하더니 히말라야 원정대를 따라 다닌다며 원정대 예길

 

밤늦도록 들으며 부러워했던 추억이 있다.

 

그러더니 어느새 원정대원에서 원정대를 직접 꾸려야 하는 원정대장이 됐고 초창기 시절

 

억대의 원정비용은 친인척, 주위 선후배나 아주 미미한 후원금을 가지고 원정을 가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것이다.

 

 

원정대의 경비중에 왕복항공료가 제일 많이 차지하고 다음은 현지국가에 내는 입산비용,

 

그리고 부식과 장비비용(대부분의 등반장비는 North Face에서 협찬)등의 순이고 또 많이

 

차지하는 비용중 하나가 바로 산소통이다.

 

6시간 정도 쓸 수 있는 산소통은 개당 50만원 정도 한단다.

 

등반대의 성공여부는 산소통을 얼마나 쓰느냐에 달려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것이다.

 

정상공격조(대개 3~4명)에게 필요한 산소통의 갯수는 넉넉히 잡으면 일인당 약 30여개

 

정도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리고 베이스캠프에도 산소통이 여러개 있어야 하고 정상공격조 외에도 베이스캠프의

 

대원들과 포터, 쎌파들도 더러는 고산병에 시달리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충분한 산소통이

 

바로 등반대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다.

 

 

베이스캠프에서부터 정상공격조와 쎌파는 전진캠프라 불리우는 제1, 제2, 제3, 제4캠프

 

그리고 정상직전의 공격캠프 설치와 산소통운반을 동시에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며

 

고소적응을 해가며 부식과 산소통을 올려 놓는다.

 

그런데, 초창기에 박영석은 원정비용이 모자라 아예 산소통을 구입하기조차 힘들어

 

산소통 없이 등반했다.

 

데려가 달라는 형편이 어려운 등반대원을 마다치 못해 데려갈지언정 산소통은 구입하질

 

못한 것이다.

 

그래서 박영석이 왠만한 히말라야의 14좌 중 여러 봉우리를 무산소 등정 한 것이다.

 

체력이나 심폐기능도 뛰어나지만 산소통 구입할 돈이 없어서 무산소 등정이 유난히도

 

다른 산악인에 비해 많은 것이다.

 

 

똑똑하고 치밀한 계획, 그리고 후배를 아끼고 선배를 극진히 공경하며 내게는 늘 술을

 

많이 사 줬다. 영석이도 말술이다.

 

 

작년 5월 작고하신 박영석의 아버님과 86년에 돌아가신 내 선친과는 동향이시다.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 황곡리 출신들 이시다.

 

1. 4 후퇴때 월남하시어 거제도 포로수용소 우측에 서서 아직까지 실향민이란

 

꼬리표를 달고 사셨고 변변한 친척이나 연고도 없어 “단천군민회” 나 “수하면민회” 등의

 

모임을 통해 영석과 나는 나이, 학년도 같아 친하게 지냈다.

 

부친간에 친하셨기에 자연스레 가깝게 지냈다.

 

영석의 히말라야 14좌 등반 도전이 본격화 되고 난 2년정도 영석의 등반을 돕는 일을

 

하게 됐다.

 

주로 협찬사를 구하느라 돌아다니며 지원을 부탁했고 국내에서는 위성전화에 매달려

 

등정소식을 언론사에 시시각각 보내는 일을 했는데 잠시도 연락이 안되면 안절부절 그런

 

숨막히는 여러 순간을 보냈던 기억이다.

 

 

히말라야를 도전하는 산악인에게는 이른바 “등정주의 ” 와 “ 등로주의 ” 로 나뉜다고 한다.

 

“무조건 정상에 깃발만 꽂으면 된다 “ 와 ” 어느 루트를 통해 올라갔느냐 “ 가 바로

 

그것이다.

 

 

이미 히말라야 14좌 ( 8,000 미터 이상급 14개 봉우리 ) 와 3극점 (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 ) 그리고 7대륙의 최고봉 등, 이른바 “산악 그랜드슬램 ‘을 최단기간에 등정에

 

성공한 박영석은 이제는 그 지칠 줄 모르고 멈추지 않는 그의 “ 도전정신 ”은 이제 “ 등로

 

주의 “로 집념을 돌려 그가 ” 코리안루트“ 를 개척해 한국인의 위대함을 떨치고자 하는

 

그의 새로운 목표였다.

 

 

안나프루나(네팔, 8,091M)는 산세와 트래킹코스가 너무 아름다워 등반객이 그 장관에

 

심취한 나머지 정취에 홀려 사고가 많이 나는 산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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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석대장과 강기석(33세) 그리고 신동민대원(37세)이 안나푸르나에 코리안루트를

 

개척, 등반 도중 연락이 두절된 지 일주일이 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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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불길한 예감이 든다.

 

너무 오랫동안 얼음구덩이 속에 갇혀있는게 아닌가 싶다.

 

우리 애들한테 영석이가 티브이에 나올 때 마다 불러놓곤 자랑을 떠들어 대며

 

“ 가장 존경하는 한국인 ” 이면서 “ 사랑하는 친구 ” 임을 강조하며 이런 저런

 

예기를 했는데 ,,,,,,,,,,,,,,

 

 

KBS 아침뉴스에선 안나프루나에 방금 전 도착했다는 영석의 아들 성우가 나와

 

 

“ 아빠 !! 추워도 참아요 ~ ” 하는데 왜 이리 눈물이 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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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처서 불구가 돼도 좋으니 살아 돌아와 같이 호흡할 수 있는 영석이길 간절히 기원한다.

 

그 불굴의 도전정신으로 살아 헤쳐 나오길 간절히 기대한다 ! ! ! !

 

 

아래 글은 “ 박영석 탐험문화재단 ” 홈페이지 게시판에 쓴 글이다.

 

 

“ 하나님께 ,, 간절히 기도 드림니다 !!!

 

아직 세상과 멀리 하기엔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부디 ,,,, 주님 !!!!!

 

그에게 ,,, 이곳 세상에서 다하지 못한 일을 하게

 

남겨주소서 !!!!

 

안나푸르나 모든 대원들 ,,,, 무사 귀환을

 

간절히 기도드림니다 !!!!!!!!!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 멘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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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영 석 ( 2 )                                                       ( 2011년 10월 27일 작성 )

 

 

칸첸중가(네팔, 8,586M)등정 때의 일이다.

 

1999년 5월 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당시에 탄력을 받은 박영석은 한해에 대여섯개의 히말라야 정상 봉우리를 찍고

 

내려오던 때였고 그만큼 등반비용과 일정도 만만치 않았다.

 

두산그룹에서 경월소주를 인수하고 미(米)소주에 이어 그린소주, 그리고 산(山)소주를

 

막 출시하던 차, 내가 두산에 잠시 있었던 계기와 진로의 아성인 서울의 소주시장을

 

호시탐탐 노리던 두산으로서는 산소주의 이미지와 시기적으로 맞아 떨어져 어마어마한

 

양의 소주(팩소주 포함)와 맥주, 그리고 적잖은 금액의 협찬금을 받아 미미하나마

 

원정대의 보탬이 된 적이 있다.

 

 

당시 SBS에서는 “히말라야의 사나이”라는 다큐시리즈를 박영석의 14좌 완등까지

 

제작 중 이었는데 바로 그 담당 PD가 “신언훈”부장(지금은 부국장)이시다.

 

SBS에서 교양 다큐 프로그램은 주말 이른 아침이나 평일 늦은 밤 나이트라인 직전에

 

방송될 정도로 한외 프로그램이다.

 

 

신언훈 부장은 “기아체험 24시” “몽골리안루트를 가다”와 박영석의 남극과 북극 탐험기

 

리고 박영석의 히말라야 14좌 완등까지 등등 그야말로 남다른 집념을 가지고 주로

 

교양/다큐 제작에 힘쓴 SBS창사 멤버이시고 MBC출신의 PD시다.

 

그런 신부장님은 박영석과 함께 히말라야 한 봉우리의 등정과정을 생중계하기로 하고

 

수년의 기간 동안 준비를 해 왔다.

 

런데 그 정보가 KBS로 흘러 들어갔는지 1999년 9월 엄홍길을 등반대장으로 “칸첸중가

 

등정 생중계“를 한다고 1월부터 예고하더니 결국 등정에 성공도 못하고 방송기자 포함

 

2명이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고가 난 것이다.

 

사실 KBS는 그런 산악 다큐물은 SBS에 비해 경험이나 노하우가 적고 대개의 히말라야

 

등반은 4월부터 8월까지 하는게 보통이란다.

 

 

나는 그해 초 무렵 그 박영석의 등정생중계를 목표로 협찬사 모색과 각종 기획안을 짜던

 

차였는데 “닭 쫒던 개” 신세가 되고 말아 허탈해 했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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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박영석대장의 안나푸르나 사고로 접할 수 있는 두가지 요소는 바로 눈사태와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라 볼수있다.

 

말이 눈사태지 얼음 덩어리들이고, 크레바스의 갈라진 틈새는 그야말로 날카로운

 

칼날 모서리나 송곳과도 같은 뾰족한 흉기들로 산재해있고, 잠깐 미끄러지기라도 하거나

 

얼음덩이에 부딪히기만 해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게된다.

 

사실 박영석은 다리, 엉덩이, 갈비뼈, 그리고 양 얼굴에 합이 열댓개 되는 철심이 박혀있고

 

등반도중 대원들도 여럿 잃었다.

 

 

한 일간지 기자와의 인터뷰 내용이다.

 

 "히말라야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은 몇 가닥뿐입니다. 신(神)이 허락해주는 시간에만

 

우리는 잠깐 올라갔다 내려오죠. 전율이 돋습니다. 제가 TV에 잘 안 나가고 사람들 모이는

 

자리에서 강연이라고 떠드는 걸 싫어하는 것은 신에 대한 겸손입니다. 숱한 원정에서 후배

 

들을 죽이고, 신이 살려줘 여기까지 왔는데 그런 걸로 팔아먹겠습니까."

 

그렇다. 박영석은 이제까지 이뤄놓은 것만으로도 영웅임은 틀림없다.

 

뭐가 그리 모자라서 또 가려했는지 ,,,,,, 일간지 기자와 인터뷰는 이어진다.

 

"그만하라는 말은 마치 내 삶을, 내 인생을 멈추란 얘기로 들려요. 뭔가 이루면 꽉 찬

 

느낌이 있어야 만족하는데,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느낌… 이룰 때마다 허탈한 것

 

같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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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첸중가 등정에 성공하고 김포공항에 마중을 나갔다.

 

기자, 선후배, 가족과 친지 그리고 협찬사와 팬들이 공항에 제법 많은 사람이 나왔다.

 

영석은 아랑곳 하지 않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는 둘째 아들 성민(당시 네살)이를

 

찾아 얼싸안고 머리위로 몇바퀴 돌리고 연실 여기저기 뽀뽀를 해 대고, 배를 까고는

 

바람을 불어대며 엉덩이에 손을 넣고 좋아하던 모습 ,,,,,,

 

집에 도착해서도 짐도 풀지않고 애들 데리고 서둘러 목욕탕에 가던 영석이 ,,,,

 

 

지금 안나푸르나에선 역대 최대규모의 수색작업이 진행되고있다.

 

수색작업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에게 박수와 성원을 보내며 더욱 더 분발하시어

 

부디 소망하는 사람들의 희망의 끄나풀을 놓지 않게 해 주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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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석의 딱 한곡 부를 줄 아는 노래 “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 ” , , , , , ,

 

 

후배들을 극진히 아꼈고, 투철한 사명감, 뚜렸한 목표의식, 냉철한 판단력의 소유자,

 

술마시며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던 ,,,

 

그런 박영석의 존재감을 ,,, 그렇지만 이젠 현실로 받아 들여야 할 때 인거 같다.

 

 

이제 그 너무도 사랑하는 이들과 , , , , , ,

 

작별을 하려한다 ㅠ ㅠ

 

 

희미해만 가는 생존소식에 마지막 한가닥의 갈망을 실어보지만 ,,,,

 

살아만 있어 달라는게 사치일까 ?

 

 

( 정말 말로 표현하기 싫지만 ,,,,,, ) ,, 시신이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게

 

너무 이른 욕심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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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 , , , , , ! ! !

 

 

괴롭고 마음이 너무 아프구나 ! ! ! ! ! !

 

 

성우 ! ! 성민이 ! ! 경희씨는 어쩌려구 ㅠ ㅠ ㅠ ㅠ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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ㅠ ㅠ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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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영 석 ( 3 )                                                         ( 2011년 12월 12일 작성 )

 

 

 

“ 박영석을 추모하며 , , , (모놀로그) ”

 

 

 

 

 

 

그 언제부터인가 내게도 지론(持論)이라는 게 생겼다.

 

“ 내가 할 수 없는 것, 내가 하기 힘든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내가 해야 하는 것”

 

이 바로 그거다.

 

 

이 네 가지의 명제를 구분하자는 것이다.

 

흔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두 번째 명제인 “ 내가 하기 힘든 것 ”을 하려고 할 때

 

말썽이 생기기 마련이다.

 

더러는 여차저차 꼼수를 부리거나 아니면 기가 막힐 정도의 운이 좋아 성공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래 가지도 못하고 심각한 부작용을 맞이하는 경우를 우린 흔히 본다.

 

이런 상황을 “ 욕심이 지나친 과욕 ” 이라 난 표현하고 싶다.

 

예컨대, 진정 더 크나큰 문제는 위에 제1명제인 “ 내가 할 수 없는 것 ”을 하려고 덤벼들

 

때 우린 그 엄청난 “ 만용 ”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성공의 가능성도 희박할뿐더러 그 과정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하며 주위의 희생은 그 일을

 

그르치며 끝내야만 후폭풍의 된서리를 한탄하며 후회하기에는 늦는다는 것이다.

 

“ 내가 할 수 있는 것 ” 은 어떻게 해서든 나와 주위를 설득시키고 머리를 잘 쓰면 주어진

 

환경 내에서 이루어 낼 가능성은 많을 것이고 “ 내가 해야 하는 것 ”은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라 나는 생각한다.

 

축구의 경우를 예들어 보자.

 

공격 상황에서 내가 골을 넣을 수 있는 찬스를 “ 내가 할 수 있는 것 ” 제3명제로 보고

 

나보다 좀 더 나은 위치에서 골을 넣을 수 있는 다른 선수에게 어시스트를 해 준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제4명제 즉 “ 내가 해야 하는 것 ”이라 불리 워 질 수 있지 않을까?

 

곽태휘나 이정수 선수처럼 현재 우리나라 국가대표 축구선수 중에 골을 넣는 수비수는

 

위에 제2명제에 해당한다고 보지만 사실 그로인한 수비에 구멍이 생긴 상황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 경우를 본다.

 

 

2002년 월드컵당시 주전 골키퍼로서 손색이 없었던 어떤 우리 대표선수중 하나는 예선전

 

이었던가? 아니면 평가전 이었던가? 하는 어떤 경기에서 골대를 비워두고 볼을 몰고 나와

 

마치 골을 넣을 양 모두를 당황케 하는 바람에 정작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는 단 한 경기도

 

뛰어 보지도 못한 선수가 있었는데 이 경우를 제1명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과욕이 부른 무모한 도전은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도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결과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물론 남미의 한 골키퍼(파라구아이의 칠라베르트선수)는 골 넣는 골키퍼로 유명한데

 

그쪽 나라의 문화적 특성(?)과 선수의 뛰어난 자질이 결합된 지극히 드믄 경우의 제2

 

혹은 제1명제라 본다.

 

사실 이 선수의 프리킥, 헤딩슛 등 공격선수로서의 능력과 기술은 대단했고 골키퍼로서의

 

자질도 출중하여 주위의 선수들은 물론, 감독과 그 국민들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로 하여금 볼거리와 흥미를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이제 박영석에게 시선을 돌려보자.

 

히말라야의 14좌(8,000미터 이상급 14개 봉우리)에 모두 등정에 성공하고 지구상의 3극점

 

(남극점, 북극점, 에베레스트)에 도달했으며, 7대륙의 최고봉(오세아니아 - 칼스텐츠

 

인도네시아와 파푸아뉴기니아의 경계 4884m / 북아메리카 - 매킨리 미국 알래스카 6195m

 

/ 아프리카 - 킬리만자로 탄자니아와 케냐의 국경부근 5895m / 유럽 - 엘부르즈 러시아

 

코카서스 5642m / 남극 - 빈슨 매시프 남극대륙 4897m / 아시아 - 에베레스트 네팔과

 

중국의 티베트 국경 히말라야 산맥 8848m / 남아메리카 - 아콩카과 아르헨티나 안데스

 

산 6959m) 정상에 태극기를 심어 이른바, “ 산악 그랜드슬램 ”을 이룩한 그가 과연 또다시

 

히말라야 14좌에 우리만의 길인 “ 코리안 루트 ”를 개척한다는 그의 의지는 과연 위의

 

“명제”중에 몇 번째 명제일까.

 

 

우리는 종종, 자기분야에서 나름의 성공을 하고는 파계(派系)하여 흥망성쇠(興亡盛衰)

 

거듭한 이들을 자주 본다.

 

 

이 글을 봐주는 우리 동문들이 나름의 주관대로 판단 할 지인데 예를 들어, 정상을 달리던

 

연기자가 정부각료에 입각하여 국감장에서 마치 브라운관 앞에서의 연기 하듯 한 언행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실소를 자아내게 한 영상이라든지, 유명 스포츠스타 출신으로 정상의

 

가도를 달리던 방송인들이 돈과 명예를 탐닉한 나머지 탈세와 폭력 등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거나, 반면에 자기 분야와는 먼 사회의 일선에 참여하여 긍정적인 큰 반향을 일으키

 

는 의식(意識)있는 이들의 성공적인 사례의 경우는 내외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자기

 

착오적인 발상에서 비롯되는 “내가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만용과 성공”의 기막힌

 

대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혹자는 “다시 내려 올 산에 뭐하러 그리 힘들게 올라가느냐”며 의문을 던지는 이들이 있다.

 

아마도 가까운 동네 주위의 산 정상을 올라가더라도 힘들게 오른 후 정상에서 맞이하는

 

성취감이나 쾌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이들의 공통된 생각인거 같다.

 

박영석이 히말라야의 8,000미터 이상의 열네 개 봉우리 모두에 “코리안루트”를 개척해야

 

한다는 과제는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내가 해야 하는 것”이라는 명제를 자신의 숙명으로

 

여겼던 거 같다.

 

 

평소 옆에서 봐왔던 그의 의지를 볼 때 숙명으로 맞이하는 지칠 줄 모르는 “도전정신”은

 

“코리안루트” 이후에도 또 다른 과제를 찾아 그의 “ 삶의 명제 ”를 살현 시키고자 아이젠

 

을 손질하고 배낭을 챙겼을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힌 야생성을 잃은 맹수는 맹수가 아니다”라는 인터뷰에서 보듯이

 

언론에 자주비추며 현실에 안주(?)하기 좋아하는 이들과는 다른 세포구조 임에는 틀림없는

 

시실인거 같다.

 

 

 

이름하여 “등로주의“를 고집하며 알파인스타일의 신루트 개척이란 그의 과제가 나 역시

 

무모한 도전이 아닌가 싶지만 과연 누가 그의 “의지”에 의문부호를 던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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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 , , , ,

 

 

박영석과 신동민, 강기석대원의 빈소가 차려졌다.

 

영결식은 3일 열시에 치르기로 돼있었고 1일 오후 다섯시 부터 조문객을 받아들이기로

 

했지만 난 일찍 서둘러 집을 나왔다.

 

감청색 양복에 흰 와이셔츠를 입고 주머니엔 검정넥타이를 곱게 말아 준비하고는 집 문을

 

나서는데 눈물이 , , , 쏟아지기 시작했다.

 

누구를 만나서 어떤 말을 해야 할 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경희씨, 성우, 성민이

 

에게는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 지 ,,, 사실 내가 그들에게는 미미한 존재이지만 내게도

 

한때는 마주보며 즐거워하며 웃음을 주고받던 ,,, 우리 아이들 앞에서는 저런 친구가 있다는

 

걸 자랑하던 그런 영석이가 아닌가?

 

버스에 타기 전 골목 한 귀퉁이에 숨어 주머니 속 넥타이를 꺼내 눈물을 훔쳐 닦고는 이내

 

병원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영안실의 입구부터 사람들로 혼잡했다. 안으로 진입 하자마자 왼쪽에는 수십여명의

 

기자들이 쪼그리고 앉아 노트북을 들고는 실시간으로 기사를 써대고 있었고 양쪽의 벽면

 

에는 수백 개의 근조화환의 띠가 걸려있었다.

 

영정을 모신 안쪽에는 좌우로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화환이 그리고 잘 장식되어 차려진

 

근조제단의 중앙에는 영석의 웃는 영정사진이 있었다.

 

 

난 영석의 영정을 똑바로 쳐다 볼 수가 없었다.

 

멀리 밖에서 보였지만 왠지 그에게 죄를 지은 거 같은 생각이 들어 바로 고개를 수그렸다.

 

영석의 아내가 잠깐 보였고 이내 문 뒤로 들어가 보이질 않은 걸 다행이라 생각하고는

 

난 어렵지 않게 신언훈부국장(SBS 교양/다큐 담당 CP)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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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그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 , , , , , ”

 

 

나는 그의 상기되고 창백하기마저 한 얼굴을 보고는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고는 태연한

 

척 주섬주섬 딴이야기를 늘어놓았지 만 그는 이내 “ 내일 모래 계속 올 거 아닙니까?

 

차차 얘기 합시다 ! “ 라며 화제를 돌린다.

 

 

“ 히말라야의 사나이 박영석 ” 이란 다큐시리즈를 17편, 그리고 남극과 북극의 도전

 

영상을 지난 십수년 여간 기획, 제작하신 분이다.

 

영석 만큼이나 의지와 집념이 대단한 분이기에 그의 ,,, 그간의 수고와 노력에 한없는

 

위로와 찬사를 보낸다.

 

 

아마도 누구보다 훨씬 더 회한과 아쉬움이 클 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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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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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엔 영석의 선친과 동향인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영석의 아버님 고향) 어르신과

 

선배가 오셨다.

 

 

이제 난 이분들과 함께 고인들에게 참배를 해야 할 시간이 됐다.

 

고향 어르신을 안내하면서 제단에 접어들며 난 영석을 보았다.

 

 

 

, , ,

 

 

 

환하게 웃는 모습 , , , , , , ! ! !

 

 

그러나 거기엔 영석의 웃음소리가 들리질 않았다 ! ! ! ! ! ! ! !

 

 

무릎을 꿇고 기도드리는 내내 쏟아져 내리는 눈물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흑흑거

 

리다가는 , , , , , , 이내 그만 엉 ~ 엉 소릴 내면서 울기 시작했다.

 

 

 

“ 아빠 , , , , 추워도 조금만 참아요 ~ ~ ” 하는 영석의 아들 성민이 목소리가 들린다.

 

 

“ 그래 ,,,, ! 영석은 얼마나 추울까 ! ! ! ”

 

 

“ 영석아 ! ! ! ,,, 넌 이대로 가야만 하냐 ? ? ? ”

 

 

“ 영 석 아 ! ! ! 넌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잖니 ! ! ! ! ”

 

 

 

안나푸르나 어딘가의 눈구덩이 속에 파묻혀 있을 영석을 생각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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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옆의 단천군 수하면민회장님이 어느새 일어나셔서 내가 일어서기를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이젠 유족들에게 절을 할 차례다.

 

 

이인정회장(대한산악연맹)이 맨 오른쪽에 그다음엔 상석(영석의 하나뿐인 남동생)이

 

그 옆엔 성민이가 그리고 영석의 두 매형(영석의 두 누님)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 회장님 !! 그간 맘 고생 많으셨읍니다 ! ! ! ”

 

친 아들처럼 , , , 친구처럼 , , , 그리고 당신이 감히 이루지 못한 업적을 대신해서

 

도전해 온 영석을 무한이 사랑하신 분이다.

 

 

, , ,

 

 

 

유족과 인사를 마치고 우린 곧바로 고인들의 가족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문을 열자마자 영석의 아내가 의자에서 일어나 우릴 맞이했다.

 

 

중학교 때 만나 연애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이제껏 살아온 그네들 ! ! !

 

 

시꺼멓게 핏기라고는 하나도 없는 초췌하고도 반쪽이 돼있는 얼굴 !

 

 

일년에 고작 둬달 남짓 영석을 마주하던 그녀가 이제 영원히 그의 살아 숨 쉬는 소릴

 

듣지 못할 걸 생각하니 측은하기 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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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희씨 나 누군지 기억나요 ? ”

 

 

“ 그럼요 성문씨 ! ! ! ”

 

 

난 그다음 할 말을 잃었다.

 

 

경희씨 손을 잡고는 난 내내 흐느꼈다 ! ! ! !

 

 

“ 살아남은 이네들은 어쩌란 말인가 ! ”

 

 

, , ,

 

 

,

 

 

 

 

난 고향 어르신과 간단이 식사를 마치고 배웅해 드리고는 밖으로 나와 하늘을 잠시 처다

 

보고는 “ 괜히 왔나 ?” 싶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집으로 향했다.

 

 

저녁 시간, 대학로 버스정류장의 분주한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난 얼른 버스에 올라

 

타서 운전기사 뒤의 하나 남은 자리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노래가 흘러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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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디로 가야하나 멀기만 한 세월

        단 하루를 살아도 나는 편하고 싶어

        그래도 난 분명하지 않은 갈 길에 몸을 기댔어

        날마다 난 태어나는 거였고 난 날마다 또 다른 꿈을 꾸었지

        내 어깨 위로 짊어진 삶이 너무 무거워 지쳤다는 말조차 하기 힘들때

        다시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대가 있고 어둠을 가를 빛과 같았어~~

        여기서가 끝이 아님을 우린 기쁨처럼 알게 되고

        산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한거지

        날마다 난 태어나는 거였고 난 날마다 또 다른 꿈을 꾸었지

        내어깨 위로 짊어진 삶이 너무 무거워 지쳤다는 말조차 하기 힘들때

        다시 나의 창을 두드리는 그대가 있고 어둠을 가를 빛과 같았어~~

        여기서가 끝이 아님을 우린 기쁨처럼 알게 되고

        산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의미는 충분한거지 “”

 

 

 

 

, , , , , ,

 

, , ,

 

,

 

 

노래가 흐르는 동안 내내 난 작은 소리를 내며 올었다.

 

가요를 별로 좋아하질 않는 내가 유행가를 들으며 운다니 , , , 그것도 사람이 많은

 

곳에서 창피하고도 그래서 얼른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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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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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말라야는 대개 팔구월 경부터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이듬해 봄 사오월 까지 온다고 한다.

 

눈이 그치고 여름에는 한낮 기온이 영상 삼십도에 이르고 밤에는 영하로 떨어지는 심한

 

일교차를 보이며 박영석과 대원들의 실종 예상지점 부근에 눈은 녹아 그들의 흔적을 찾기는

 

쉬울 것이란다.

 

 

그 때가 되면 또다시 주위의 슬픔이 휘몰아치겠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길 바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이질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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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끝으로, 그간(?) 그야말로 물심양면 모두를 합하여 박영석을 사랑하고 지원하신 신언훈

 

부국장님(SBS 교양제작국 CP)과 이인정 회장님(대한산악연맹), 정상욱 상무님(North Face

 

영원무역), “월간산”의 한필석 형님, 제주도에 이종량 형님, 그리고 단 한 번도 만나 뵈지는

 

못했지만 구자준 LIG손해보험회장님, 들께 특히 진심으로 머리 숙여 위로와 그간(?)의찬사를

 

보내 드립니다 !!

 

 

분명히 ,,, 단언 하건데 ,,, 이분들은 당신네들 기업이익이나 사리사욕을 떠나 그야말로

 

당신들이 감히 엄두도 못내는 “위대한 일”에 대한 대리만족으로 영석을 사랑하며 옆에 남기를

 

바라던 분들이었을 것이다.

 

 

, , , , , ,

 

, , ,

 

,

 

 

 

 

 

이 글을 읽어준 동문 친우들께도 감사를 표하고 , , , , , ,

 

 

 

이미 많이 이루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명제를 찾아 끝없는 도전”으로 유명을

 

 

달리한 박영석에게 존경과 사랑을 표하는 바 이다.

 

 

 

 

 

^ ^




김성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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